‘비어있음’을 통해‘있음’을 보(여 주)다.
신보슬(큐레이터)
사람들은 하지 않은 말 속에서 더 많은 말들을 읽어내곤 한다.
그리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내기도 한다.
최수환이 만들어낸 수백 수천 개의 비어 있는 구멍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이미지로 도드라지게 들어난다.
비록 그 이미지가 허상일지라도,
잠시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라도,
그리고 그 눈이 계속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미지로 읽고,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정작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텅 빈 구멍임에도 불구하고.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을 처음 보았던 날,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작품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공간개념(Concetti Spaziali)의 연작이었던 듯싶다. 한없이 깊은 코발트 블루로 칠해진 캔버스 한 가운데, 단번에 내리 찍은 듯한 날카로운 칼로 찢긴 흔적이 깊은 블랙홀을 만들고 있었다. 책에서 수없이 보았던 작품이었건만 실제로 보니 만들어낸 캔버스의 우아한 휘어짐, 그리고 절개선이 만들어낸 긴장감과 비어있는 공간이 만들어낸 깊이감은 쉽사리 발길을 뗄 수 없었다. 최고로 절제된, 그리고 단호하게 모든 에너지를 모아 단 한 번의 액션을 통해 만들어진 절개와 그로인해 눈에 들어온 비어 있는 공간의 깊이 안으로 시선은 한없이 빨려들어 갔다. 문득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비어 있는 공간이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폰타나의 의도가 비어있는 공간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가 만들어낸 비어있음은 그 어떤 가득 차 ‘있음’보다 강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수환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폰타나의 작품을 보았던 그 느낌이 생각났다. 물론 까만 정사각형의 패널 안에 촘촘히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을 통해 아라베스크 문양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최수환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폰타나의 작품과는 다르다. 폰타나의 절개행위가 단호하고 직관적인 순간의 행동(action)에 기반 한다면, 원하는 이미지를 전사하여, 전동드릴을 통해 하나하나 구멍을 뚫는 최수환의 행위는 기계적이기도 하고, (어느 평론가도 지적했듯이 만나다를 그리는 듯한) 수도적 행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폰타나의 작품이 비어있는 공간 안으로 한없이 시선을 끌어들이는 블랙홀과 같다면, 최수환의 작품은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서 새어나오는 빛을 망막에 자극시켜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두 작가의 구멍이 망막에 작용하는 방식은 정반대에 가깝다. 무엇보다 공간연구에 집착했던 폰타나의 작업에는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드러내지 않은 채 생성된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하지만, 최수환은 비록 전원이 들어와 불빛이 켜져 있을 때만 한시적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보고 있는 이미지 자체를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두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결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수환의 작품들을 볼 때 폰타나의 그 팽팽한 긴장감의 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 안에서 비어있음(emptiness)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최수환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라이트 드로잉(light drawing)’, 이미지와 일루젼 사이의 관계, 이미지를 본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라는 세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 이루어졌다. 작가 역시 작가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빛(형광등 혹은 LED), 아크릴 판(plexiglass), 종이(museum board)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나의 작품에서 빛과 수천 개의 구멍들은 빔(emptiness)를 의미하는 동시에 형상을 나타낸다. 관객들은 움직임과 빛의 어른거림 그리고 구멍의 다양한 크기들로 인해 평편한 작품표면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관객들은 나의 작품에서 사과(apple)의 형상을 보았다고 믿을 수 있으나 사실은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천 개의 구멍들을 통해 비추어지는 빛들만이 존재한다.’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빛이 주는 환영의 이미지, 본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Emptiness_white frame>(2006)에서 작가는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여 검정색 아크릴 판 외곽에 클래식한 마치 거울이나 액자의 프레임처럼 보이는 디자인의 장식을 구멍을 뚫어 표현했다. 전원이 들어오면, 작품의 사각에 화려한 프레임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가운데 어두운 아크릴판은 거울처럼 지나는 관객의 모습을 담아낸다. 작품 앞에 마주한 관객은 거울을 보듯 작품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된 구멍들을 통해 빛이 나는 프레임을 보기도 한다. 물론, 프레임은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프레임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만 그곳에 존재할 뿐.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신이 보는 이미지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미지를 읽는데 있어서‘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seeing is believing)’를 믿을 만큼 단순하고 순수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은 종종 스스로를 기만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을 ‘이미지와 환영’이라는 틀에 한정지우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동어반복에 그치며, 작품에 내재하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실제로 최수환은 공간 혹은 비어 있음/없음과 같은 개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초기 작품에서 최근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제목은 주로 <emptiness_>의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개인전 역시 <Walk in Emptiness>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지금껏 천착하고 있던‘emptiness’개념은 사전적으로 공간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 즉 비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비어있다는 것 자체는 문화적, 철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그리 녹녹하지 않다. 예를 들어, 비어 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매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도 하고, 언제나 어떤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양에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보다 복합적인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비어있는 공간(emptiness)’을 ‘걷는다’는 그의 표현 역시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빛과 이미지/일루전이라는 주제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본다면, 그의 작품에서 공간의 개입이 더욱 중요해지고, 적극적이게 될 것이다. 아크릴패널에 한정되어 있을 필요도, 인공조명에 국한될 필요도 없다. 관객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최적화된 상태에서 관객이 빛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또다시 비어있음을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관객은 인공조명에 의한 각막의 자극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루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의 작품 안에는 이러한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하고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최수환의 작품에는 분명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층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층위들은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보다 복합적이고 풍성한 생각의 단초들을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층위들이 여전히 드러나 보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의 그의 작업에 더욱 관심이 가게 하는 지점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로서 그가 해야 할 더 많은 형식적 실험과 밀도있는 내용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한 걸음 더 딛고 나왔을 때, 그가 만들어낸 빈 구멍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되는 혹은 실재하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창이 되어 관객과 마주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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