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그린 환영, 마치 만다라와도 같은
고 충 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어둠 속에 이미지가 부유한다. 손과 발, 입술과 눈동자 같은 신체 부위가, 식물과 정물이, 아스라한 수면과 야트막한 산등성이와 같은 풍경이, 금박액자가, 아라베스크와 같은 식물문양을 변형한 추상적 패턴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흡사 섬세한 유리보석이 촘촘한 천공을 보는 것 같은, 꽤나 정교해서 그 실체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생생한 이미지들이다. 이처럼 어둠 위로 이미지를 밀어 올리는 것으로 치자면 빛 말고는 없다. 빛 드로잉이다. 그렇게 빛이 그린 그림에 취해 있다가 불현 듯 이미지는 지워지고 공간은 다시 처음의 어둠속으로 되돌려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미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미지들은 실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순수한 환영이었을까.
알고 보니 전원이 나갔다. 전원이 켜지면 나타났다가 전원이 꺼지면 사라지고 마는 이미지, 그것은 마치 빛과 어둠의 길항과 부침이 그려낸, 유사 이래의 천변만화의 스펙터클한 드라마를 온과 오프의 기계적인 미디어 혹은 전자 미디어 환경으로 구현한 신비주의의 현대판 버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존재와 부재, 실상과 허상, 실재와 환영의 미묘한 경계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순수한 환영은 아니었다. 분명 어둠 위로 자기를 부각하는 이미지, 그러면서도 실재한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이미지, 실재와 환영 사이에 존재하는 이미지, 실재를 품고 있는 환영이며 실감나는 환영이었다.
그렇다면 작가 최수환은 이처럼 실감나는 환영을 어떻게 구현하는가. 그 프로세스를 보면, 먼저 종이에 원하는 이미지를 전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지가 전사된 종이를 검정색 아크릴 판에 대고, 전동 드릴을 이용해 수백수천 개의 크고 작은 미세 구멍을 뚫는 방법으로 이미지 그대로를 되살려낸다. 이미지 그대로 아크릴 판에 옮겨지는데, 이미지가 전사된 종이가 일종의 원본 내지는 원판 역할을 해 원칙적으로 에디션이 가능하다. 비록 기계적인 공정이 아닌, 철저하게 수공으로 이뤄지는 과정인 탓에 에디션 간에 미세한 차이를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에디션과 함께 에디션 하나하나의 오리지널리티 곧 원본성마저 담보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판이 완성되고 나면 라이트박스를 판 뒷면에 부착해서 판 위의 구멍 사이사이로 빛이 투과되게 하는 식으로 일종의 빛 드로잉이 구현되는 것이다. 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빛과 구멍이 작업의 핵심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아크릴 판을 통해서 구멍을 구현하고, 라이트박스를 통해서 빛을 실현하는 것이다. 라이트박스가 빛의 원천인 셈인데, 처음에는 형광등이 장착된 라이트박스를 사용하다가, 이후 점차 초소형 LED 소자 혹은 단자가 장착된 기판을 사용해 작업이 눈에 띠게 슬림해지고 심플해진 감이 있다. 기판을 보면 기판 가장자리를 따라 LED 소자가 촘촘하게 배열돼 있고, 기판의 표면에는 가로세로의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LED 소자로부터 발해지는 빛을 반사하는 길이나 골 역할을 한다. 기판의 표면에 일종의 빛이 지나가는 길이 생기고, 그 길이 빛을 되받아 작업 전면에 빛을 고르게 분배하는 원리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작가의 작업이 다만 기술과 수공의 결과인 것 같고,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도 든다. 당연하게도 작가의 작업은 이런 기술과 수공의 경계를 넘어서 보다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은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이 그려낸 이미지에 착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일루전이다. 구멍도 실체가 없고(구멍은 비어있다), 실체가 희박한 것으로 치자면 빛 역시 뒤지지가 않는다. 이처럼 실체가 없거나 희박한 것들이 어우러져서 일루전을, 실감나는 환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실체가 없는(혹은 희박한) 것이 실체가 있는(혹은 생생한) 것을 만들어내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 더욱이 구멍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마저 탑재돼 있다. 이를테면 구멍은 공간의 본성인 빔, 공, 허, 무의 거대담론의 지점들을 상징하고, 생명원리의 기본요소인 호흡과 숨결이 지나가는 길이며 통로를 내는 행위에 비유할 수가 있고,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 통하게 하는 소위 탈 경계의 논리를 실천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빛과 관련해선 착시효과가 주목된다. 즉 작가의 작업은 외부환경에 반응하는 이미지 혹은 형상을 보여주는데, 관객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서 마치 이미지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종의 옵아트 이후를, 이를테면 포스트 옵아트를 예시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아마도 일정한 두께를 갖는, 그러면서도 빛을 투과하는 아크릴 판 자체의 성질에 기인할 것이다. 말하자면 빛이 아크릴 판에 뚫려진 구멍에 되비칠 때 미세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이로써 실제로는 평면 이미지에 지나지가 않는데 그 미세 그림자로 인해 일종의 입체 효과가 생겨나는 것.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평면이지만, 약간만 비켜서서 보면 평면 이미지가 입체로 왜곡돼 보이면서 마치 화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혹은 희박한) 것이 실체가 있는(혹은 생생한) 것을 밀어 올리는 역설(그 역설은 흔히 텅 빈 충만을 의미하는 공간의 역설과도 통한다). 그리고 이차원의 평면 이미지를 삼차원의 입체 이미지처럼 보여주는가 하면, 더욱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하는 착시효과. 뭔가 확하고 오질 않는가. 작가는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고,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과의 차이를 건드리고 있고, 보는 것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보다 더 또렷한 실체감을 얻는 차원이 열린다. 빈 것은 과연 빈 것일 뿐인가. 색즉시공공즉시색.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이 불러일으킨 욕망(착각)에 지나지가 않는다. 빛이 그린 그림, 즉 실체가 있으면서 없는 이 이상한 그림은 비어 있으면서 형상으로 들끓는 모순율의 세계, 아이러니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마치 천겁만겁의 업을 그림으로 도해한 만다라를 보는 것 같다(그 업의 겹겹이 사실은 일루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일루전임을 깨닫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와해되고 마는).
존재하지 않는 형상, 부재하는 형상, 말 그대로 일루전일 뿐인 이미지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고, 선입견을 재고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실재(현상)인지를 묻는다는 점에서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에포케와도 통한다. 광학을 매개로 현상학의 핵심에로 인도하는 일종의 광학적 현상학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각은 불안정하다. 시각은 때로 거짓말하기조차 한다. 외부환경에 따라서 똑같은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인식하는 게슈탈트 이론과도 물리는 대목이다. 형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텅 빈 공간을 대면하게 하고, 실체를 내밀면서 동시에 실체 없음에 직면케 한다. 빛이 그린 그림은 일루전이고, 환영이고, 판타지다. 화두 자체다.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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